2010/08/11/Wed
검은콩 이야기 2010. 8. 11. 22:08 |#1.
나리는 매일 저녁 우리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간다. 아침은 동네 아주머니께서 마련해주시는 식사를 하는 것 같다. 공원 한 구석에 아침 여섯시 반쯤이면 고양이들이 모여드는 곳이 있는데 알고보니 옆집 아주머니께서 아침 일곱시마다 사료와 물을 놓아두는 곳이다. 늙은 요크셔테리어를 키우시는 아주머니인데, 우리동네 자유고양이들이 모두 '나리'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 아주머니 때문이다. 일전에 우리집 검은 콩을 보시더니 '나리야~'하고 부르시는것을 보니 모든 고양이를 그렇게 부르시는 것 같다. 아무튼 우리동네 아주머니들은 고양이의 존재에 관대하신 편이라 내가 괜히 마음이 놓인다. 동네에 고양이들이 제법 느긋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지나가던 어느 사람도 고양이에게 위협을 가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어느 집은 그 집 개인 주차장에서 고양이가 새끼를 일곱마리나 낳았는데 매일 차가 드나드는 곳임에도 새끼들이 젖을 뗄 때까지 그곳을 떠나질 않는 것을 보니 적어도 그 집 사람들이 고양이를 쫓아내지는 않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집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인데도 우리동네 아주머니들도 그 집에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는 것을 알고있는 것을 보면 그 집 식구들이 고양이가 주차장에서 육아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2.
우리 집 건너편에는 마당이 넓은 집이 있다. 나무도 많고 잔디도 있는 그런 집인데 어떤 노부부가 살고 있다. 지난달에 리태 2차 접종을 마치고 집에 올때 이동장 안에서 리태가 하도 울어대서 마침 지나가시던 할머니 한 분이 고양이 키우냐며 물어보신 적이 있었다. 동네에서 항상 폐휴지를 모으시는 분이라 근처 사시는 분인가보다 하고 병원에서 주사 맞히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대답해드린 적이 있었는데 어제 집 앞에 있는 나를 보시더니 고양이는 잘 있느냐고 안부를 물으셨다. 알고보니 바로 건너편 그 집 주인이셨다. 고양이 잘 크고 있다고 말씀드리니 한 번 보길 원하셔서 리태를 데리고 나가 보여드렸다. 할머니께서 '아이구 고놈 참 예쁘다' 하시며 칭찬을 하셨는데 '고놈 참 까맣기도 하네. 약고양이네'라는 말도 섞여 있었다-_-;; 어허허허 할머님... 할머니께서도 집 마당에 고양이를 한마리 키우고 있다고 하셨는데 아직 어린 새끼라고 하셨고 털 색깔은 '알쏭달쏭'하다고 하셨다. 삼색이구나ㅋㅋ '알쏭달쏭한 털 색'이란 표현이 너무 재미있었다. 리태보고 약고양이라고 할 땐 조금 식겁했지만ㅋㅋㅋ 먹이는 무엇을 먹이고 있는지 화장실은 어떻게 하는지, 예방접종 비용은 얼마인지 이것저것 물으셨는데 잠시 후에는 동그란 고무 대야에 한 가득 모래를 퍼담아 가시는 모습을 보았다. 할머니께서는 그 알쏭달쏭한 고양이의 화장실을 그렇게 놀이터에서 퍼온 모래로 만들어주고 계셨던 것이다. 알쏭달쏭이는 먹이로 고등어도 먹고 밥도 먹고 한다고 했다. 사료를 먹이면 건강면에서 더 좋고, 예방접종을 하면 몇 가지 고양이가 잘 걸리는 질병은 피할 수 있고, 놀이터 모래보다는 고양이 전용 모래가 위생상 더 좋겠지만 괜히 참견하지는 않았다. 비가 오는대도 그 비를 맞아가면서 고양이를 위해 고무대야 한가득 모래를 퍼오시는 할머니를 보며 동네 아주머니들이 '고양이 모래 퍼오셔요?'라며 아는척을 하자 할머니 얼굴에 연신 미소가 보였기 때문이다. 생활 환경이야 어떻든 치명적인 위협이 있지는 않은 이상 알쏭달쏭이는 할머니에게 꽤나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잔디밭 위를 폴짝폴짝 잘도 뛰어서 논다던데 그 예쁜 모습이나 한 번 봤으면 좋겠다.
#3.
오늘은 리태 3차, 마지막 종합접종을 하고 왔다. 오늘도 역시나 오고 가는 길 모두 택시를 이용했다. 이동장에 들어가면 싫다고 지치지도 않고 울어대는 녀석이니 아무래도 대중교통수단은 민폐다 싶은 생각때문이다. 택시 탈때도 일단 고양이가 한 마리 있는데 탑승해도 괜찮겠냐는 질문부터 한다. 오늘은 다행이 가고 오는 길 모두 기사님께서 호의적이셔서 편하게 다녀왔다. 물론 리태는 열심히 울어댔지만. 오는 길에는 기사님이 고양이에게 호기심을 보이시며 한 번 보고 싶다고 이동장에서 꺼내달라고도 했다. 까만 리태를 보고 예쁘다는 말씀도 해주셨다. 병원에서 리태는 주사도 잘 맞고 발톱도 잘 깎고 귀청소도 참 잘했다. 배신감 느껴라...집에서는 발톱 한 번 깎으려면 자고 있는 녀석 어르고 달래야 하는데 남자 수의사선생님한테는 폭 안겨서 얌전히 잘 깎는다. 남자를 좋아하는 건가...지난번 여자 선생님이 진찰 봐주셨을땐 발톱 못자르게 발버둥쳤는데... 아무튼 언제나 주사는 얌전히 잘 맞는다. 오늘은 레볼루션도 했다. 진료를 마치고 선생님께서 내게 '드래곤 길들이기'를 봤냐고 물으셨다. 리태가 거기에 나오는 그 드래곤을 닮았다고 하셨다. 일전에 디시 냥겔에서도 리태 사진을 보고 거기에 나오는 '투쓸리스'라는 용을 닮았다는 리플이 있었는데 정말 닮긴 했나보다.
#4.
오늘 아침에는 리태가 왠일로 내 옆에 누워 엄청난 골골송을 들려주었다. 요즘엔 더워서 저 멀찌기 떨어져 자는 날이 많았는데 오늘은 옆에 꼭 붙어 누웠다가 내가 자세를 바꾸면 또 다른 자세로 옆에 누워 구룩거렸다. 고양이가 구룩구룩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는 일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평온감을 가져다 준다. 나는 요즘 행복하다. 리태가 오고 나서부터는 매일 행복했다. 기쁨이 넘쳐흐르는 그런 행복이라기보다는 매일이 평온하고 편안한 그런 행복이다. 나는 정말 행복하다.